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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일기2009/04/04 22:26


1.
뇌의 주름 사이사이에 찌든 때가 낀 것 같다. 가끔씩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보지만 뇌에 가득 찬 뿌연 안개는 걷히지 않는다.


2.
글렌 굴드. 어느 정도의 감수성이 있는 사람이 글렌 굴드를 둘러싼 이야기(그것이 과장된 것이든 아니든)를 접하게 되면, 그것이 문학적이든 영화적이든 어떤 영감을 받기 마련인가 보다. 2009 경향 신춘문예 당선작인 현진현의 '글렌 굴드 이야기' 외에도 김중혁의 소설집 <악기들의 도서관>에 수록된 '자동 피아노' 등 그를 다루거나 그에게서 모티프를 얻은 작품은 꽤 많다.
굴드의 데뷔 음반과 생전에 발매된 마지막 음반을 장식하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아리아'로 시작해서 '아리아'로 끝난다는 것, 연주 중 허밍을 하거나 자신만의 의자를 가지고 다니는 등 피아노 연주와 관련된 굴드의 습성들, 연주회에서 물러나는 그의 결단, 고독을 즐기는 성향, 굴드의 사후에 컴퓨터와 자동 피아노로 재현한 그의 음악을 둘러싼 논쟁들.... 굴드는 충분히 다른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될 만하다. 

김중혁의 '자동 피아노'는 읽어보지 못하고 줄거리만 전해들었으나 그 이야기에서 굴드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나뿐 아니며, 또한 다분히 의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연히 발견하고 출력해서 집에 오는 버스에서 다 읽어버린 현진현의 '글렌 굴드 이야기'는 밋밋한 맛이다. 소설의 마지막에 일러두고 있듯, 여러 피아니스트들의 일화를 '소설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일상의 톱니바퀴에서 잠시 백일몽을 경험하는 전체 플롯, 그것의 계기가 꺾인(혹은 접은) 꿈의 파편과 만났을 때라는 것, 소설이 그리고 있는 몇몇 이미지들의 상투성(문은 좁고, 창문도 아주 작은 방에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가 있다. 이제는 너무나 흔해져버린 초현실주의 그림 같다.), 어린 시절의 우상의 환영(幻影)과 만나면서 끝나는 것까지. 나는 이런 류의 글을 숱하게 만나봤다. 소위 언론고시를 준비하는 취업준비생들의 글에서다. 그 중에는 물론 나도 있었다. 주요 일간지의 신춘문예에서 내가 너무 센세이션한 걸 기대했는지 모른다. 당선 소감대로 '꿈이 좌절된 사람에게 위로됐으면' 제 역할을 다 한 것일테니 말이다. 굴드의 음악처럼.
 

3.
집에서 엄마와 밥을 먹는데, 엄마가 '뭔 돈을 그렇게 많이 줬냐'고 물으셨다. 엄마의 생일에 나는 현금 50만원을 찾아서 봉투에 넣어드렸고 엄마는 받으시면서 한 20만원 정도 되는 줄 아셨는데 나중에 열어보고 깜짝 놀라셨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엄마의 생일 이야기를 하셨다. 생일에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생일 같은 거 다시는 안 챙길라고 하셨단다. 엄마는 밥을 먹으면서 서러워서 우셨다.
...
오늘 잠깐 회사에 들렀다가 집에 와보니 엄마가 울고 계셨다. 내가 왜 우냐고 물어도 아무말 없이 눈물만 흘리시다가 말문을 여셨다. 병원에서 갑상선 검사를 했는데 목에 혹이 많다면서 조직 검사를 해보라고 했단다. 그러면서 엄마가 몸이 아파서 아빠하고 너희들한테 죄스럽다고 하셨다. 나는 겨우 눈물을 참고, 손이나 잡아드리면서 그런 생각하지 말고 건강하시라고 했을 뿐이다. 내가 엄마한테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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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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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래 된 글이지만.) 어머님은 괜찮으시죠... ;;;
    우리 엄마, 지난주 갑상선 암 수술 하셨어요.

    책 리뷰 따라 왔다가
    외면일기라는 카테고리가 맘에 들어서 글을 죄다 읽고 있습니다.
    미셸 투르니에의 책을 재밌게 읽었기 때문입니다.

    (양심 없이) 흔적없이 가려다가 엄마 얘기에 울컥해서.

    2010/09/17 01:33 [ ADDR : EDIT/ DEL : REPLY ]
    • 감사합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위로가 때로는 감동적이기도 한 것 같아요. 어머니는 괜찮으세요. 검사 결과도 위험한 정도는 아니신 것 같고요. 뎀뵤님 어머님도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이런 말이 위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갑상선 암은 암 중에서는 비교적 가벼운 암이라고 하더군요. 뎀뵤님이 읽으신 그 책에서 카테고리 이름을 따온 게 맞는데 정작 저는 그 책을 아직 접해보지 못했네요. 상기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기회에 읽어봐야겠어요^^

      2010/09/17 09:40 [ ADDR : EDIT/ DEL ]